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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

윤대녕, 누가 걸어간다


"일단 자네는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속히 집으로 돌아가게. 그런 다음 옷을 갈아입고 서울에서 아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차를 가지고 마중 나가게. 그렇게 되면 아내를 속이는 게 되지만 실은 그게 아니야. 아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녀는 열흘 전 서울에 갈 때와 달리 무슨 변화가 생긴 걸 조금도 원치 않아.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라구. 더불어 얘기하면 내일 오전에 관리소에서 샤워 꼭지와 찬장 문을 달러 올 걸세. 그러니 늦지 않도록 귀가하게."

"굉장하구만."

"별로 그럴 것도 없어. 나는 너니까. 이 며칠 자네와 통화하면서 몹시 피곤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즐거웠어. 그리고 이 참에 얘기하는데 진심을 가지고 대화할 사람이 없다고 너무 투덜거리지 마. 그렇다면 자신을 붙잡고 계속 얘기하면 되는 거야. 그러다보면 어느 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도 쉽게 말이 통하게 돼 있어. 그리고 또한 나무와 물고기와 동물들과 대화하는 것도 멈추지 마. 그들은 언어 이전의 언어로 얘기하니까 모름지기 들어둘 게 많아. 모두가 잠든 밤에 귀를 열어두고 있으면 들리지. 그네들이 머리맡으로 다가와 밤새 두런거리는 소리가. 함께 산이나 바다로 놀러 가자고 꼬드기는 소리가."

<올빼미와의 대화> 중에 나오는 부분이다. 주인공은 제주도에 살고 있다. 아내가 장모 병간호를 위해 서울에 간 사이에 일상의 균열을 느끼고, 자기도 알지 못할 힘에 의해 아내 몰래 서울로 올라간다. 조금만 틈이 벌어져도 그동안의 일상적인 삶이 심하게 뒤틀릴 수도 있다. 그때 주인공의 또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올빼미사내는 주인공에게 충고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 소설집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보통 사람들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에서 어느 정도 일탈해 있다. 때문에 외롭고 을씨년스럽고 막막해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일탈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막판까지 가느냐 돌아오느냐, 무너져 내릴 것인가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어느 쪽인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일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집어치워야 하는 것인가? 어는 쪽이든 내가 <찔레꽃 기념관>의 여자처럼 공허함을 견녀낼 수 있을지...자신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