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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

진달래 덤불속으로 사라진 히치하이커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면서 1년을 쉬고 있을 때였다. S의 집은 서울이었지만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심하면 청주에 있는 나를 불렀다. 그때 둘이 자주 했던 일이 헌책방을 돌아다니는 일이다. S는 무료할 때면 헌책방을 찾으러 돌아다녔고 내가 가면 그곳들을 구경시켜주곤 했다. 신나게 책을 사다보면 어느새 비닐봉지가 꽉차곤 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가벼워져 양손에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고서 닭갈비집을 향하곤 했다.

그때 건진 대어들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더글라스 아담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다. 두 권을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 4권짜리였다. 2권까지 읽고서 뒤의 내용이 궁금해 한동안 서점을 훑기 시작했다. 이미 '새와 물고기'라는 출판사는 사라진 지 오래됐고 책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운좋게도 대형서점 구석에 꽂혀있는 3,4권을 발견했다.3,4권 두 권뿐이었다. 나를 위해 거기 꽂혀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책꽂이에 4권을 나란히 꽂아 놓고, 그걸 볼 때마다 행복해지곤 했었다.






그후 나는 양평으로 발령이 났고, S는 IMF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나와야했다. S는 그의 부모가 살고 있는 서울로 다시 올라갔고, 나는 양평에서 쓸쓸하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몇 편의 시를 썼는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붙들고 있던 시가 바로, <진달래 덤불속으로 사라진 히치하이커>다. 지금 보니까 좀 치졸한 맛이 있다. 지금 그 시를 생각하고 이 책을 생각하니 그 시절이 먹먹하게 그리워진다.

기억하는 한, 내가 늘 나 자신이 아닌 듯한 야릇한 지분거리는 느낌에 고통 당해 왔어.*

기억에도 없던 마을을 버스를 타고 지나갔지 그때 난 '한겨레 21'의 시사 SF만화를 훑어보고 있었어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시골풍경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지 다시 잡지에다 머리를 박으려던 나는 버스안을 힐끔거렸지 자기들끼리 너무도 익숙한 몸짓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낯.설.어. 너무 낯설어, 훌쩍이며 창밖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버스가 산길을 달리고 있잖아 이끌려 이끌려 다다른 곳은 <핏빛 행성>이란 곳이었지.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내 등을 떠밀며 소리쳤어. "당신은 <익숙한 행성>에서 추방됐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진 마라. 우리만의 잔치를 망치게 할 순 없었다. 그럼 안녕!"

-> <핏빛 행성> - 일명 <진달래 덤불>이라고도 함. 마음을 버스 뒷좌석에 흘리고 다니는 놈들의 정신 재무장 훈련소.

어디서나 차를 얻어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 아무도 나를 걷어차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 사실이었어. 숨쉬는 것처럼, 매력적인 갈대의 웃음소리처럼, 그 소리를 들으며 흘러가는 물처럼. 그래 솔직히 얘기하면 난 미치도록 행복하고 싶었고, 숨막히게 고독해지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을 놓아버렸어. 그리고 추방됐다.

꽃잎이 일렁일렁, 온통 붉은 융단위에 누워 이렇게 진달래 꽃잎만 따 먹다간 붉은 보자기가 되고 말거야 붉은 똥을 싸고, 붉은 웃음, 붉은 울음, 쏟아내던 나날, 그리고 꽃잎이 지기 시작한다

붉은 망또를 뒤집어 쓰고 은하계를 떠돌다가 지나가는 우주선에 히치하이킹하는 나를 보거든 잠깐 시선이라도 머물다 가게나

그동안 흘리고 다닌 마음들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자포드 비블브락스'의 생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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